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얄타 회담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독일]]의 분할([[동독]]/[[서독]]) 및 비무장화와 선거 합의, [[나치 독일]] [[전범]]과 잔재의 청산, UN의 기초적인 얼개, 소련의 대(對) [[일본 제국|일본]] 전쟁 참전, [[폴란드]]의 정부 구성과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. 이 회담으로 독일은 향후 동방 영토를 대거 상실했는데 [[오데르-나이세 선]] 동쪽 모든 영토[* [[동프로이센]] 전역, [[슐레지엔]]과 [[포메른]]의 대부분, [[브란덴부르크]]의 일부, [[작센]]의 극히 일부. 참고로 포메른의 주도 [[슈테틴]](슈체친)의 도심은 오데르 강 서안에 위치해 있었지만 점령자 스탈린은 이 도시 전역을 신생 폴란드에 넘겼다.]를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했다. 자세한 내용은 [[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-폴란드 영토 논란]] 참고. 루스벨트는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-소련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소련의 팽창을 경계한 처칠의 우려에도 어지간한 사안에 대해서는 소련의 손을 들어주었다. 동유럽의 세력 재편성도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제안을 전격 수용한 전형적인 사례다.[* 처음부터 다 들어준건 아니고, 특히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던 폴란드 문제에서 루스벨트와 처칠, 스탈린은 말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회담장에서의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자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중재에 나섰으며 폴란드와 [[발트 3국]] 등은 큰 틀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했지만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에 이르는데 문제는 전후 이 [[거짓말은 하지 않는다|선거가 실시되긴 했지만]] [[소련 공산당]]의 노골적인 개입과 공작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[[짜고 치는 고스톱]]이 되어 동유럽 지역 상당수가 소련에 병합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. 이때 소련은 헝가리 등 [[민족주의]] 정당의 세가 강해 투표로 병합이 안될 것 같은 나라에선 우선 [[공산당]]과 민족주의 정당의 [[연립 정부]]를 수립하도록 유도한 다음 점차 공산당 [[일당독재]]로 넘어가는 일종의 꼼수를 취하기도 했다.] 당시 [[핵무기]]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명확한 시점에서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다는 점도 루스벨트에게는 무시할 수 없었다. 문제는 미영 측 협상단의 방 안에 소련의 [[도청기]]가 쫙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. 더구나 미영 측 협상단 내에는 소련 [[간첩]]도 있어서 소련은 미영의 의도를 대부분 알고 협상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소련이 전후 처리의 흥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. 그런데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사실 당시 [[미국]]은 숙소에 도청기가 널려 있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며 소련에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. 이는 대통령 [[프랭클린 D. 루스벨트]]의 의향이었는데 전후 세계 평화가 확립되려면 향후 양대 초강대국이 될 것이 분명한 [[미국]]과 [[소련]]의 진정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.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중 처칠이 미-영 회담을 제안하거나 소련을 배제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면 도청 우려도 있어서인지 이를 거부하고 스탈린한테도 친근하게 굴었다고 한다.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이 얄타 회담을 [[냉전]]의 시작으로 본다. 이때부터 미영과 소련은 이해관계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. 얄타 회담은 회담국간 기본적인 예의와 협의의 틀은 지켰으나 그들 사이의 속내와 이견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장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[[아돌프 히틀러|히틀러]]가 바란 [[연합국]] 간의 균열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미 연합국들 간에는 추축국의 일방과 단독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. 사실 [[1944년]] 나치는 [[파울 요제프 괴벨스|괴벨스]]를 중심으로 소련과 단독 교섭을 진행하다가 크게 실패를 거두기도 했다. 참고로 다음 회담은 아예 독일령인 [[포츠담 회담]]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독일이 패망한 지 오래였다. 애초에 '3거두 회담'이라고 하지만 1945년 2월 시점에서 향후 [[대영제국]]이 해체될 것은 불보듯 뻔했고 미국과 소련의 흥정과 거래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들러리에 가까웠다. 어떤 의미에서 얄타 회담은 [[초강대국]]으로서 [[19세기]]와 [[20세기]] 초반을 풍미한 [[대영제국]]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던 동시에 영국이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차기 초강대국과 나란히 선 마지막 순간이었다. [[윈스턴 처칠]] 개인으로서도 그의 영예의 마지막이었는데 그해 7월에 열린 [[포츠담 회담]]에서는 아예 보름 가량 이어지던 회담 도중에 [[영국 노동당]]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처칠이 [[클레멘트 애틀리]]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. 사실 회담 당시 이미 각국 수장들은 모두가 고령의 노인인 데다 지옥같은 [[전쟁]]을 치르면서 격무에 시달린 탓에 셋 다 건강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. 스탈린은 전쟁 지도 및 행정 업무의 격무로 매우 심신이 지쳐 있었고[*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12시간의 격무에 매달렸고 이는 이미 60대의 노인이었던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. 전쟁 초기의 1941년과 전쟁 말기의 1945년의 스탈린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등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.] 루스벨트는 이미 [[뇌경색]]으로 한 번 쓰러졌던 사람이라 전시만 아니었다면 대통령을 그만두었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던 탓에 이 회담으로부터 불과 2달 후에 사망한다. 처칠은 세 사람 중 가장 오래 살았으나 훗날 그도 [[치매]]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건망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.[* 나이는 윈스턴 처칠이 1874년생, 스탈린이 1878년생, 루스벨트가 1882년으로 당시엔 각각 71세, 67세, 63세였다. 이 중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렸던 루스벨트가 제일 먼저 사망하고 그 다음이 스탈린, 결국 가장 장수한 사람은 최고령이었던 처칠이다. 더욱이 회담 후 20년을 더 살았다.] 그래서 사실 당시 회담은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[[해리 S. 트루먼]]이나 [[뱌체슬라프 몰로토프]] 같은 양측 2인자들이 합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 회담이 끝난 지 약 5개월 후 [[포츠담 회담]]이 다시 열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